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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추적-2] 통일교인 ‘장기(長期) 감금’ 충격 부른 일본판 ‘수용소 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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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8회 작성일 25-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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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체 : 브레이크뉴스
  • 날짜 : 2024-12-25
  • 링크 : https://www.breaknews.com/1081061

  • 한국산 통일교회 1959년 일본 선교 이후, 그야말로 모진 박해-탄압 견뎌내

    세계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대한민국에 일본산(日本産)종교들이 들어와 자유로이 포교, 거대한 교세를 확보하고 있다. 한국산(韓國産) 종교인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회)은 일본에 진출, 선교에 성공한 교단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최근 일본 정부 차원에서 한국산 종교에 대한 탄압이 가해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23년 10월 13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회)의 종교법인 해산명령 청구를 했다. 이는 가정연합이 1964년 종교법인 자격을 취득한 이후 처음으로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단체’로 규정,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철퇴를 내린 것. 최근 일본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한국산 종교인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회)이 탄압받는 실상(實相)을 추적 공개한다.(글쓴이 주)


    언제나 새로운 종교가 선교를 시작할 때는 박해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 일본에서 창립될 당시부터 박해가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의 첫 선교사인 최봉춘 씨는 밀입국자 신분이었다. 당시 한일 양국 간에는 국교가 정상화하지 않아 정상 루트를 통한 입국이 어려웠기 때문에 밀입국을 결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5개월 동안 감옥신세를 지면서도 금식 등 지극 정성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냈다.


    1959년 10월 2일 일본 도쿄 유케이샤(雄鷄舍) 2층에서 첫 예배를 봄으로써 교회가 출범한 이후 1960년대 초 구보키 오사미(久保木修己) 씨 등 중심 간부 여러 명이 입교했고, 1962년 12월 16일부터 행정 체제가 갖추어짐으로써 정상적 궤도에 올라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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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선명 목사(중앙)와 구보키 오사미 회장(1964년 8월). ©브레이크뉴스 


    1960년대 중반에 들어와 교회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한 일간지에서는 도쿄 거리에서 전도하는 신도들의 사진을 배경에 깔고 ‘세계를 하나로’ ‘일본에서 번지는 통일교회’라는 기사를 통해 일본 교회의 발전상을 소개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64.11.1). 이때 일본에는 1천여 명의 신도와 50개소의 교회가 있다고 밝히고, “도쿄의 긴자 거리에는 통일교회 부인 신도들이 버젓이 전도를 하기에 이르렀고…. ‘세계를 하나로’라는 운동을 펼쳐 나가고 있다.”라고 활동 내용을 소개했다.


    일본 교회의 중심은 젊은이들이었다. 도쿄대학 게시판에 “이곳에 사랑과 진리가 있다”라는 내용의 회원 모집 포스터를 붙이고 맹렬히 활동하는 모습이 일본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일본 언론은 통일교회 운동에 많은 학생이 발 벗고 나서고 있는 현상을 가리켜 학생 운동의 큰 전환이라고 평가했다(1967.8.27 주간한국).


    일본 교회 수난과 공산당 개입


    이러한 활발한 움직임 이면에는 여러 가지 반작용도 일어났다. 그 첫째가 가정연합에 나가는 자녀들을 둔 부모들의 일부가 조직한 ‘피해자 부모의 회’ 활동이다. 1967년 7월 7일 자 아사히신문 사회면에 ‘부모를 울리는 원리운동, 학생 사이에 퍼지는 학업 포기와 가출’이라는 기사가 나가는 등 각 언론이 부정적 기사를 앞다퉈 보도했다. 이러한 이면에는 공산당 등 좌익세력이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는 등 부모들을 부추긴 측면이 강하다.


    1968년 일본에 국제승공연합이 창설되면서 승공운동이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승공운동은 주로 공산당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공산주의 이론을 반박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공산당과 대결해 나갔다. 이에 정면으로 투쟁을 선언하고 나선 상대가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와 일본 공산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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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년 ’공산주의는 잘못되고 틀렸다’는 현수막을 앞세우고 시위하는 승공연합 회원들.     ©브레이크뉴스 


    공산당이 합법화한 나라에서 승공운동을 펼치다 보니 자연히 쟁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 가정연합은 일본 내에서 공산당의 확산을 방지하고, 궁극적으로 공산주의를 극복하자는 데 목표를 두고 활동해 나갔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공산당과의 마찰은 점점 깊어져 갔다. 일본 교회는 ‘공산주의는 틀렸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공산당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러자 공산당은 가정연합과 관계가 좋지 않은 단체나 신도 부모들을 배후에서 지원, 가정연합을 공격한 것이다. 이렇듯 일본 가정연합의 박해 배후에는 일본 공산당이 깊숙이 개입됐다.


    일본 가정연합 박해의 경과


    가정연합은 일본에서 그야말로 모진 박해를 견뎌내야 했다. 대부분 반대부모회와 공산당이 개입된 조직적 박해였다. 연도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일본 수용소 열도》에서 인용).


    △1973.4.22 혼마 데루코(本間てる子), 피해자 부모의 회 ‘요코카이(陽光會)’ 설립

    △1973.9.7 중의원 본회의에서 일본 공산당의 요네하라 이다루(米原昶) 의원이 ‘통일협회를 규제하라’라는 내용의 발언

    △1975.1.25 아라이 사무실에서 혼마 데루코 등 20명이 모여 ‘원리운동 대책 부모의 회’ 결성

    △1975.3 ‘피해자 부모를 지원하는 회’ 결성

    △1975.4.27 도쿄의 야마데(山手) 교회에서 ‘제1회 피해자 부모의 회 전국대회’ 개최. 이후 수 차례 개최

    △1975.7 A군을 도쿄의 구루메가오카(久留米ヶ丘) 병원에 감금(2개월간)한 이후 납치·감금 사건 속출

    △1976.5 고토 도미고로(後藤富五郞)가 마루야마 다카시(丸山陵) 등과 함께 ‘원리 피해자 갱생회’ 설립

    △1977.2.13~20 공산당 기관지 《적기(赤旗)》, 가정연합 공격 기사 연재

    △1977.2.17 이시바시 마사시(石橋政嗣) 사회당 서기장이 국회에서 ‘가정연합 규제’ 발언

    △1977.5.27 일본 공산당의 마사모리 세이지(正森成二), 사회당의 요코야마 도시아키(橫山利秋) 의원, 국회에서 가정연합 공격

    △1978.3.31 일본 공산당의 후와 데쓰조(不破哲三) 서기국장 기자회견. 미국 하원 프레이저 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인용, 가정연합 공격

    △1978.5.10 일본 공산당 제14회 당 대회에서 가정연합에 대해 본격적인 공격 자세를 취할 것을 결의

    △1978.6.1 일본 공산당 마사모리 세이지(正森成二) 의원, 국회에서 가정연합 공격

    △1978.6.5 일본 공산당 미야모도 겐지(宮本顯治) 위원장, 당을 총동원해 가정연합 공격 지령

    △1978.6.13 일본 공산당 가미야 신노스케(神谷信之助) 의원, 국회에서 가정연합 공격

    △1978.7.6 일본 공산당 야스타케 요오코(安武洋子) 의원, 국회에서 가정연합 공격

    △1978.8.4 반대부모의 회, 각 정당에 가정연합 규제를 요망하는 진정서 제출

    △1978.10.11 반대부모의 회 집회에 공산당 마사모리 세이지(正森成二), 가미야 신노스케(神谷信之助) 의원과 사회당 요코야마 도시아키(橫山利秋) 의원 등이 참석

    △1978.11.3 ‘원리운동을 우려하는 회’ 모임 발족 다음날 《적기》에 대대적 보도

    △1979.2 반대부모의 회, 국회에 가정연합 규제 진정

    △1979.7.9 반대부모의 회, 문선명 목사 입국 반대 집회

    △1979.7.11 사회당 요코야마 도시아키 의원, 국회에서 문선명 목사 입국 반대 요청

    △1979.11.16 원리운동을 우려하는 회, 지치의대(自治醫大) 의사를 초청해 ‘세뇌를 생각한다’라는 제목으로 강연회 개최. 가정연합 신도 정신병원 감금 본격화


    ▲ 《일본 수용소 열도》, '아직도 계속되는 통일교회 신자에 대한 납치감금'이란 설명이 붙은 책자.  ©브레이크뉴스

    수용시설과 정신병원에 감금당한 신자들

     

    일본 가정연합 신자들을 탈회시키려는 공작의 배후에 일본 공산당과 사회당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 이들은 특정 종교를 가졌다고 해서 정신병원에 감금, 개종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악랄했다.

     

    일본 가정연합은 2022년 7월 현재 강제 개종과 탈회를 위한 납치·감금을 겪은 신도가 4천여 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이들 신도는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간 종교 탄압과 인권탄압의 극치인 납치·감금의 사태를 겪었다. 특히 1990년대에는 연간 300명이 넘는 신도가 납치·감금을 당했다. 이는 국제 인권단체에도 이러한 피해 사례가 보고되기도 했다.

    이렇듯 종교의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 일본에서, 더구나 수도인 도쿄에서 개종을 강요하는 폭력적 감금 시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충격을 주고 있다. 원리피해자갱생회(회장 고토 도미고로)는 ‘신생회 홈’을 버젓이 운영했다. 이 감금 시설은 창문에 쇠 창틀을 덧붙여서 출입을 통제했다.





    이 시설을 만든 고토 도미고로는 신자들을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시키거나 자택에 감금하도록 친척을 선동해온 가정연합 반대운동가이다. 그는 그렇게 하여 생계를 꾸려 나가는 직업적 탈회 브로커다. 그는 처음에는 가정연합에 입교한 아들 때문에 반대 활동을 해왔으나, 그 아들이 그만둔 후에도 ‘전국 원리운동 피해자 부모의 회’ 회장을 맡으면서 가정연합 신자들을 감금해서 탈회시키기 위한 활동을 교사하는 일에 앞장서 왔다.


    ‘신생회 홈’을 만든 또 다른 한 사람은 가정연합의 전 신자였던 마루야마 다카시(丸山陵)이다. 그는 가정연합 신자들을 납치해 감금하고 개종을 강요한 탈회 브로커다. ‘신생회 홈’ 고문인 마루야마는 L씨(여성)를 몇 번이나 강간한 전력을 갖고 있다. 그는 L씨의 부모에게 가정연합을 비판하면서 ‘신생회 홈’에 감금할 것을 교사했다. L씨는 1976년 10월 3일 ‘신생회 홈’에 감금된 이후 마루야마의 협박으로 가정연합 탈회서를 냈고, 10월 21일 마루야마의 집으로 옮겨져 감금됐다. 그는 몇 차례 마루야마로부터 강간을 당한 뒤 1977년 1월 24일 탈출했다. L씨는 마루야마와 고토 도미고로 등을 체포, 구금, 감금, 유괴, 강간, 상해죄로 도쿄도 네리마 경찰서에 고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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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년 5개월간 감금당한 고토 도오루 씨.   ©브레이크뉴스 


    ‘신생회 홈’을 탈출한 V씨(남·25)는 감금 생활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잠깐의 틈을 보아 창문 철조망을 찢고 도로에 뛰어내려 맨발로 도망쳤다. 정말 무서워서 심장이 찢어지는 것처럼 생각됐다. 마루야마(丸山) 등은 수갑을 채우는 등 신체의 자유를 빼앗으면서 원리를 그만둘 것을 맹세하도록 했다. 종교 탄압이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신생회 홈’은 개설 2년 후에 폐쇄됐다. 그러나 이 기간 수용됐던 가정연합 신도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신생회 홈’의 운영에 관해 회장인 고토 도미고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 우선 로프와 쇠사슬로 손발을 묶고 잠을 재운다. 그러기 위해 부모들은 그 아이를 억누를 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

    (2) 때리는 것은 제정신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이다.

    (3) 그 후 마루야마가 강의하고 설득한다. 정신이 안정되어 있으므로 머리에 잘 들어간다.

    (4) 고립된 4장 반과 6장 반의 방에 쇠사슬로 묶어 둔다. 통일원리를 버리면 6장 2칸의 큰방으로 옮긴다.

    (5) 원리에 증오심을 갖게 되면 졸업이다.

    (6) 한 달 비용은 50만 엔에서 60만 엔이다.

    (7) 새로운 입회자 부모로부터 입회금으로 20만 엔을 받는다. 그 후 회비로 매월 3만 엔을 받는다.


    가정연합 반대에 앞장선 혼마 데루코의 경우, 딸이 가정연합에 들어갔다고 해서 반대운동을 했다고 하지만, 그 딸은 부모의 불화에 고민하다가 입교했다. 혼마는 남편이 실종되는 등 만족스럽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대해 반대운동으로 보상받으려 했다는 것이 주변의 평이다.


    혼마는 1972년 11월 상경하여 공산당계의 ‘신후진(新婦人)’과 민쇼오(民商) 대회, ‘어머니 대회’ 등에 대표로 나섰고, ‘요코카이(陽光會)’라는 원리운동 반대부모의 회를 만들어 회장이 되기도 했다.

    그는 자기 딸을 정신병원에 감금했고, 여러 감금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규슈대학생인 G씨가 미야자키시의 와카쿠사(若草) 병원에 감금된 사건에 혼마가 관련됐음을 후쿠오카 고등재판소 미야자키 지부에서 G씨의 부친이 증언했다.


    또 초등학교 교사인 S씨(여성)가 도치기현 정신병원에 감금된 사건, 무사시대학(武蔵大学) 졸업생인 A씨가 도쿄 구루메가오카 병원에 감금된 사건, 히로시마현 K씨(여성)가 요네다 쓰네히사(米田恒久) 자택에 감금된 사건 배후에 혼마 데루코가 관련돼 있었다.


    혼마와 같은 반대자들은 가정연합 신자들의 부모를 찾아가 가정연합에 대해 나쁘게 선전한 뒤 정신병원에 감금하도록 교사했다. 부모들은 그들의 말을 믿고 자식을 속이거나 완력으로 정신병원이나 ‘신생회 홈’ 등에 감금했다.


    통일교회 반대 활동가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신자들을 감금한 뒤 “가정연합에 들어갔기 때문에 발광했다.”라는 식으로 선전했다. 그리고 학교에 다니는 교인들을 입원시킨 후에는 “가정연합에 들어갔기 때문에 중퇴했다.”라고 선전했다.


    이와 함께 신자들을 정신병원에 감금한 이후에는 자유를 구속할 뿐만 아니라, 수면제 등을 주사한 후 저항할 수 없게 만들고, 지나간 일을 기억할 수 없도록 정기적으로 약을 먹게 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렇게 오랫동안 입원한 신자들 가운데는 약물 중독이나 심리적 불안 상태 등 후유증을 앓는 이들도 많았다.


    법원의 석방 결정, 공산당 개입 폭로


    도쿄의 고등재판소가 1980년 3월 ‘정신병원 수용에 의한 개종은 위법’이라는 결정을 내린 이후 가정연합 감금 사건의 실태가 폭로되기 시작했다. 당시 가정연합 신자들을 감금한 사건이 20여 건이 넘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들은 표면상으로는 부모가 자녀들을 입원시키거나 감금하였지만, 그 배후에는 일본 공산당과 결탁한 가정연합 반대운동 그룹의 교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공산주의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카를 마르크스), “공산주의 사회는 기존의 여러 종교를 무용으로 하고 소멸시키는 역사적 발전단계이다.”(엥겔스)라는 식으로 종교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다. 그 때문에 공산주의의 허구성을 파헤치고 종언(終焉)을 선언한 가정연합에 대해서는 더욱 극렬하게 대립해 왔다.


    가정연합과 공산당이 가장 격렬하게 대치한 곳이 일본이다. 일본의 공산당과 사회당은 대정부 질문이나 건의문을 통해 정치 문제화하거나 가정연합 반대자들의 대변인이 되기도 했다.


    전국원리운동 피해자 부모의 회가 1976년 가을부터 1977년 2월까지 조사·발표한 ‘가정연합 신자 사망자 3명, 행방불명 32명’ 등의 내용은 반대자들에게 중요한 자료로 인용된다. 피해자 부모의 회는 1977년 1월 27일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총리에게 서한을 발송했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당 이시바시 마사시(石橋政嗣) 의원이 주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후쿠다 총리에게 질의를 하기도 했다(1977.2.8 한국일보 등). 결국 이 사건은 법무성 인권옹호국의 지시로 조사에 나서면서 ‘피해자 부모의 회’ 발표가 잘못됐음이 드러났다(《일본 수용소 열도》 406~413쪽 참조).


    그러나 공산당계의 변호사들이 감금 사건의 배후에서 깊숙이 개입, 사건을 더욱 복잡하게 했다. 특히 일본 가정연합은 승공운동을 통해 하나님을 부정하는 공산당의 허구성을 폭로하기도 했으나, 그들의 조직적 반격으로 엄청난 수난을 당해야만 했다.


    암약하는 일본 목사, 그 음모


    가정연합에 대한 반대 활동은 대부분 기독교 일부 지도자들에 의해 전개됐다. 그것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본 교회 신자들의 납치·감금에 따른 폭력 개종 사건을 교사해 온 일부 목사들도 가정연합을 반대하는 부모와 결탁해 불법 납치·감금 등 인권유린 행위를 자행해 왔다. 납치·감금을 행한 것은 친족이지만, 감금한 신자의 탈회를 설득한 것은 기독교 일부 목사나 탈회 브로커 등이었다.


    가정연합에 대한 전국적 반대 활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1970년대 초기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의 반대 활동은 크게 3단계로 나눠 볼 수 있다. 우선 제1단계는 1973년 4월 22일 혼마 데루코(本間てる子)에 의해 ‘전국 원리운동 피해자 부모의 회’가 창설돼 탈회 브로커인 고토 도미고로를 회장으로 하여 활동한 단계다. 고토는 신도들을 쇠창살이 쳐진 독방에 감금하거나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도록 부모들에게 교사했다. 그러나 그는 고소인들과 법정에서 싸우다가 급사하고 말았다.


    고토는 자신의 브레인이었던 혼마 데루코와 노선이 다른 것이 드러나면서 반대부모의 회에서 이탈, 1976년 5월 마루야마 다카시(丸山陵) 등과 함께 ‘원리 피해자 갱생회’를 설립했다. 이 모임은 폭력적 개종가 그룹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불법 행동을 자행했고, 회원인 마루야마 다카시는 부녀 폭행·강간 등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이때는 폭력적 수단에 의한 개종의 단계였다.


    가정연합과 승공연합의 활동에 위기의식을 느껴 온 공산당은 가정연합 신자들을 탈회시키기 위해서는 일부 목사들과 공조해서 활동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외적으로 교회를 압박할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신앙을 붕괴시키고자 하는 책략이다.


    여기서 제3단계로 일부의 반대 목사들과 좌익세력들이 공조해 탈회 설득에 관여하게 된다. 전국적으로 가정연합 신자들의 개종 활동을 친족들에게 교사하고, 반대 활동에 참여한 목사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 기독교단에서는 삿포로 홋코우교회 에노모토 에이지 목사, 동교회의 하시모토 사나이 목사, 십이사도교회 R. 가이덴 목사, 도마고마이 야요이교회 오쿠무라 노리요시 목사(이상은 홋카이도), 다니무라교회 가와사키 교코 목사(야마나시현), 하마마쓰 엔슈에이코 영광교회 이즈마 히데오 목사(시즈오카현), 하마마쓰 엔슈에이코교회 이즈마 히데오 목사(시즈오카현), 다케오교회 고바야시 다케시 목사(사가현) 등을 들 수 있다.


    일본 복음 루터교회에서는 나가노교회 히라오카 마사유키 목사, 야이즈교회 사이토 고지 목사 등이다. 일본 어셈블리 오브 것 교단에서는 무라가미 히소카 목사(교토부), 동맹 그리스도에서는 니즈 복음그리스도교회 마쓰나가 야쓰도모 목사(니가타현), 일본 가톨릭에서는 모도하라교회 노마 히데아키 신부(나가사키현)가 관여했다. 그 외 동북대학원대학 교수 아사미 사다오, 그리스도교 서점 사이토 소지(나가사키현), 세븐데이 어드벤티스트교단의 와가 신야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목사는 가정연합을 기독교의 이단으로 보고 《원리강론》의 내용에 대해 말꼬리 잡기식의 비판을 하고 있다. 특히 부모들에게 자녀들의 납치·감금을 교사하거나 신자들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뒤 신체적으로 나약하게 한 상태에서 세뇌, 개종시키고 있다.


    반대 목사들은 가정연합 비판서를 내놓기도 했다. 아사미 사다오가 쓴 《통일협회=원리운동》, 모리야마 사토시의 《통일교회에서 참메시아로―원리강론의 잘못을 바로잡는다》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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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 3월 23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여성 통일교인 70여명이 일본에서 자행되는 납치, 감금에 대한 대책 기자회견을 갖고 주한 일본대사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브레이크뉴스 


    목사들의 불법적 행위


    가정연합 신자들에게 개종을 강행하고 있는 반대 목사들은 자신의 행위가 정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주장하면서도, ‘암약한다’라고 할 정도로 조용히 일을 처리했다. 납치·감금의 실행은 어디까지나 친족들이 행하게 하고, 자신들은 관여(교사)했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최대한 주의를 기울였다. 만일 불법 감금에 대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날 경우 헌법에 명시된 ‘신교의 자유’를 침해, 법적인 제재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신자들의 부모들에게 납치·감금을 교사할 경우에도 그 증거를 남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또 그들은 부모에게 가정연합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켜 자식에 대한 불신의 마음을 증폭시켰다.

    일본 복음루터교회 소속의 사이토 고지(齋藤幸二) 목사에 의해 강제 개종의 설득을 당하다가 도망쳐 나온 A씨(여성)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나와 부모 사이의 신뢰 관계는 아주 강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어머니에게 말을 하여 접근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딸인 나의 일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나의 마음은 상처를 입었고, 어머니 역시 나 이상으로 괴로움을 겪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때까지는 서로가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일거에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것들이 붕괴됐다. 얼마나 서로가 상처를 받았는지 알 수 없다.”


    가정연합을 반대하는 목사 측에서 내놓은 자료에는 납치·감금을 명백하게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87년 4월 4일 자 《교단신보》에는 ‘탈회자가 말하는 원리의 실태’라는 주제의 좌담 기사가 실렸다. 일본 기독교단의 다니무라교회 가와사키 교코(山崎經子) 목사와 가정연합 탈회 신자의 기사이다.


    가정연합 전 신자인 다나카 겐이지(田中建一·가명)는 “작년 4월 아침 5시께 마이크로버스가 집 앞에 갑자기 멈췄고 나는 거기에 강제로 태워졌다. 물론 도망치려고 했지만, 친지를 포함해서 20명이 나를 둘러쌌다.”라고 증언했다. 또 가타오카 준코(片岡順子·가명)도 “금년 2월 말 교묘한 꾐에 빠져 여기(다니무라교회)까지 따라오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가정연합 신자가 반대 목사의 교회에 갈 때까지는 자기 의사가 아니라 강제로 끌려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가정연합을 이탈하게 된 것은 반대파를 중심한 주변의 강제적인 설득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 목사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법적인 문제로까지 갈 경우에 대비, 모든 죄는 부모에게 뒤집어씌우고 자신들은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었다.


    일본 예수 그리스도교단 오기쿠보 에이코교회 모리야마 목사가 쓴 《통일교회에서 참메시아로》라는 책에는 모리야마 목사가 납치·감금에 손댔음을 증언하는 내용이 드러나고 있다. 이 책 100쪽에서 168쪽이 통일교회에서 이탈한 게이코의 수기이다. 이 수기의 110쪽에서 147쪽에 걸쳐 납치·감금 사실이 극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가노의 T온천에 머물고 있는 부모로부터 연락을 받은 나는 오랜만에 부모에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며 부모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갔다.


    현관에 들어가 시선을 로비 쪽으로 보냈을 때 거기에는 TV를 보고 있는 2명의 신사가 있었다. 그들은 눈빛이 예리하고 내 얼굴을 무엇에다 조각이라도 하는가 싶게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110쪽). 그들은 모리야마 목사(114쪽)와 회사를 갖고 있는 아마노(天野) 사장(124쪽)이었다.


    나는 부모와 여동생을 만나 넷이 목욕탕으로 가자고 했을 때 아버지가 ‘게이코 그냥 집으로 가자.’라며 선전포고를 해왔다(111쪽). 나는 일순 전신에 전율을 느꼈다. 로비에 있던 모리야마 목사와 아마노 씨가 현관으로 내려서서 유리 파편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111쪽).


    그 순간 외삼촌과 이모부 등 몇 사람이 나를 안아 현관 바로 옆에 세워둔 검은 색 택시에 태웠다(112쪽). 모든 일들은 충분한 계획에 따라 이뤄진 것 같았다. 여관 사람들이 떠들지 않는 것을 볼 때 그들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한순간을 위해 준비돼 있었다(112쪽).”


    번뜩이는 감시자의 눈


    게이코를 태운 택시는 쉬지 않고 달려 모리야마 목사의 영광교회에 도착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모리야마 목사로부터 성서 강의가 시작됐다. 그 주위에는 7명이 둘러싸고 있었다(116쪽). 게이코는 당시 감금 생활을 이렇게 털어놓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기도했다. 가정연합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는 Y씨와 K씨(모두 게이코의 숙부), 그리고 담화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지만 계속 나는 갇힌 상태였다. 화장실에 갈 때도 망보는 사람이 붙고, 작은 홀에 가더라도 감시의 눈이 번뜩였으며, 창문에는 거의 덧문이 있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이 따르고 끈질기게 따라붙었다.”(124쪽)


    아마노는 감금 상태에 있는 게이코를 계속 세뇌했다. 게이코가 돌려 보내달라고 호소하면 아마노는 “네가 성서를 공부하여 원리와 비교, 바른 판단 아래 납득을 한다면 돌아가도 좋다.”(125쪽)라고 대답했다. 게이코가 “원리가 잘못됐음을 알 때까지 무기한 있으라고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말할 정도로 강압적이었다.


    게이코가 전화하려는 것이 발각돼 심한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는 “나의 몸을 누르는 팔이 몇 개나 뻗쳐 왔다. 나는 무엇엔가 끌리는 것처럼 반미치광이가 되었고”(139쪽), “나의 머리는 완전히 파열되어 퓨즈가 나가고 냉정 회로는 이미 끊어져 버렸다.”(140쪽)라고 말했다.


    이 수기를 보면 게이코의 머리는 정신과 육체에 대한 가혹한 세뇌 때문에 정상을 넘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정신적 패배를 당하고 만 것이다.


    반대자들의 끊임없는 공격


    탈출자들이 납치·감금 사실을 폭로하면서 일부 목사들이 개종 활동에 적극 개입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는 사회 문제가 됐고, 반대 목사들과 일본 교회 측의 논전도 가열됐다. 일본 가정연합 고바야시 아키오(小林昭夫) 당시 총무부장은 ‘모리야마 목사의 반론에 답한다’라는 글을 통해 일련의 사태에 관해 설명했다.


    “최근 전국에서 가정연합 신도에 대한 강제 개종을 목적으로 목사·신부 등에 의한 납치·감금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그 실상은 피해자들의 호소에 의해, 또 신문에 소개되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폭력적 개종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모리야마 목사로부터 가정연합에 대한 반론문이 나왔다(1987.6.14 크리스챤신문, 7.4 그리스도 신문). 그러나 반론문의 내용은 너무나도 사실이 왜곡됐다.


    모리야마 목사 등에 의해 자행된 납치·감금에 따라 피해를 본 가정연합 신자들의 정신·육체적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번에 모리야마 목사의 반론을 간과해 버린다면 그들의 고통을 더 한층 가중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용기를 가지고 탈출해 온 그들의 명예를 위해서도 여기에 대해 실상을 확실히 밝히고 싶다.”


    고바야시 총무부장은 납치·감금의 실태를 하나하나 반박하면서 “문제는 가짜와 진짜를 바꾸어 놓은 것”이라며 “반론은 거짓 덩어리”임을 밝히고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모리야마 목사의 글은 사실을 철저히 왜곡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기만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가정연합은 이러한 목사의 횡포에 대해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글은 일본에서 발간되는 종교신문(1987.7.5~9.20)과 중화신문(1987.6.1.~8.1)을 참조했음>. <계속>


    *필자/권오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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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월드 편집국장 등을 거치면서 저자는 오랫동안 취재현장에서 경험하고 발굴한 자료를 중심으로 여러 권의 서적을 펴냈다. 특히 《다 함께 누리는 행복》 《생각 나눔, 공감 그리고 행복》 《마음혁명 비로소 행복한 나를 만나다》 《신가족시대 행복 만들기》 《전환기의 문화인식》 《디지털 문화 읽기》 《전환시대 생존조건》 《일본천황 한국에 오다》 《말 말 말》 《바다경영,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이것만 알면 바른 글이 보인다》 《글쓰기~ 한방에 끝내기!》 《논술 심층면접 한방에 해결한다》 《논술여행》 등의 저서들이 독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종교 관련 저서로는 김수환·정진석 추기경과 혜암·서옹 조계종 종정 등 종교계 원로들을 인터뷰한 《산다는게 뭔고하니》를 비롯해 《종교의 미래를 말한다》 《탈이념 탈종교시대 새로운 선택》 《종교는 없다》 《성인에게 길을 묻다》 《성인에게 듣는 시대정신》 《신(神)의 시크릿코드》 《이웃종교를 위한 변명》 《종교의 품격》 《분노하는 신》 《예수와 무함마드의 통곡》 《영계론, 사후세계를 말한다》 등이 있다. omk200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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