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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추적-1] '아베 신조' 전 일본총리의 피습사건 이후 통일교회 탄압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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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3회 작성일 25-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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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체 : 브레이크뉴스
  • 날짜 : 2024-12-24
  • 링크 : https://www.breaknews.com/1081019

  • 일본 기시다 정권 ‘한국산 종교인 통일교 탄압’ 내막

    세계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대한민국에 일본산(日本産)종교들이 들어와 자유로이 포교, 거대한 교세를 확보하고 있다. 한국산(韓國産) 종교인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옛이름 통일교회)은 일본에 진출, 선교에 성공한 교단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최근 일본 정부 차원에서 한국산 종교에 대한 탄압이 가해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23년 10월 13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옛이름 통일교회)의 종교법인 해산명령 청구를 했다. 이는 가정연합이 1964년 종교법인 자격을 취득한 이후 처음으로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단체’로 규정,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철퇴를 내린 것. 최근 일본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한국산 종교인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옛이름 통일교회)이 탄압받는 실상(實相)을 추적 공개한다. (글쓴이 주)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옛이름 통일교회)은 일본에서 승공(勝共)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면서 좌익세력과 등져왔고, 일본 개신교 지도자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아왔다. 결국 이들은 일부 신자들의 부모를 앞세워 납치·감금이라는 극단적 반 가정연합 활동에 나섰다. 여기에 가정연합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전국영감상법대책변호사연락회(전국변련)’라는 좌익 계열의 변호사 그룹이 언론에 허위 사실 유포를 주도하는 등 가세하면서 사건을 확대·재생산하는데 앞장서 왔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정권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피습사건 이후 가정연합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빌미로 이들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종교법인 해산명령을 청구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역대 정권이 승공운동을 통해 맺어온 인연을 단절하고 가정연합의 말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은 가장 큰 세력인 아베파를 궁지로 몰아넣고, 바닥으로 떨어진 민심을 회복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으나 몰락을 자초하고 말았다.


    81c0fc8a1355e65788ee2001460d7128_1736097741_3747.jpg▲문선명 목사(왼쪽),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와 요담(193.11.22) ©브레이크뉴스 


    81c0fc8a1355e65788ee2001460d7128_1736097781_7507.png▲ 세계반공연맹 세계대회(1970.9.20).png  ©브레이크뉴스  


    마침 일본 정부의 가정연합 말살 정책을 자세히 소개한 《하늘은 결코 손해 보지 않는다》라는 책자가 나왔다. 이 책은 일본 가정연합이 일본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세력과 대척점에 있게 배경과 4천여 가정연합 신도들이 납치·감금 당한 사건, 그리고 기시다 정권의 종교 말살 음모에 대해 폭로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4차에 걸쳐 그 내용을 요약하거나 전제하고, 보완 취재하여 싣게 됐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과 맞물린 문선명 목사와 일본 가정연합의 활동을 통해 우리 사회의 변화와 종교계의 동향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으로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 개척과 승공운동, 그 여파


    문선명 목사는 1941년 4월부터 1943년 9월까지 일본 유학 생활을 했기에 누구보다도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 가장 먼저 선교사를 파견했고, 일본이 어려울 때마다 도움의 손길을 펼쳤다.


    문 목사는 1950년대 후반 국내에 전도의 열기가 확산하고 교회가 전국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할 때 세계를 향한 거보를 내디뎠다. 특히 문 목사는 하나님의 섭리사적 측면에서 한국이 ‘아담 국가’라면 일본은 ‘해와 국가’라고 보고, 앞으로 아시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올 것으로 생각하면서 계룡산 갑사에서 기도하던 중 1957년에 입교한 최봉춘 선교사를 일본에 파송할 것을 결정한다.


    당시 한일 간에 국교 정상화가 이뤄지지 않았기에 사실상 일본 선교는 불가능했으나, 하늘 뜻이 그만큼 시급했기 때문에 최 선교사는 불가피하게 밀항선을 타고 일본 선교에 나섰다. 물론 문 목사가 일본 선교를 결단한 것은 첫째, 일본을 살리기 위해서다. 일본은 대한민국을 36년간 지배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탕감을 치러야 하지만, 이러한 일본이 섭리적 중심국가가 됨으로써 이를 넘어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둘째로 한국을 살리기 위함이다. 당시 세계의 국가들이 하나둘 공산화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만약 일본이 공산화되거나 용공의 입장에 서게 되면 한국이 위기를 맞는다는 사실을 예견했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깰 수 있는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시켜 일본에 파송한 것이다.


    최 선교사는 밀항선에 승선을 시도하다가 잡혀서 심하게 구타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하여 드디어 1958년 6월 15일 밤 밀항선에 올랐다. 입항 역시 계속 거절당하면서 고쿠라 항에서 이와쿠니 항으로, 다시 히로시마 항으로 전전하다가 6월 22일 구레 해상보안부 경비정에 발견되어 밀입국 혐의로 연행됐다. 여기서 최 선교사는 매를 맞고 머리를 땅에 내리찧는 곤욕을 당하다가 검찰에 송치돼 재판을 거친 뒤 6개월의 중형을 받게 됐다. 이 모든 것이 일본을 대신하여 최 선교사가 탕감을 치른 것이다.


    그리고 최 선교사는 형을 마치게 되면 한국으로 송환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어떻게든지 탈출하여 섭리사적인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지만 좀처럼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출소 이후 송환하는 배를 기다리는 5일간이 있었다. 최 선교사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금식을 하면서 환자처럼 국립병원에 입원한 뒤 탈출의 기회를 엿보았다. 다행히 의사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3개월간 치료를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가 드디어 4월 어느 토요일 병원에서 탈출하게 됐다. 그리고 도쿄에 도착한 뒤 험난한 일본 개척의 발걸음을 내딛게 됐다.


    이렇듯 최 선교사는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최 선교사의 정성과 투지에 하늘도 어찌 무심할 수 있겠는가? 일본에 도착한 지 1년이 지나면서 시미즈 요시오(淸水義雄), 스다 도쿠(須田トク), 다무라 요시코(田村芳子) 씨 등 하늘이 예비한 사람들을 하나둘 찾게 되어 드디어 1959년 10월 2일 신주쿠구 도쓰카초 니초메(新宿區 戶塚町 二丁目) 85번지, 오늘의 니시와세다 니초메(西早稻田 二丁目) 18-23에 위치한 유케이샤(雄鷄舍) 시계포 2층에서 첫 예배를 올리게 됐다.


    ‘평화 치매’ 일본을 각성시킨 승공운동


    문선명 목사는 하나님의 실존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를 인류의 적으로 규정하고, 세계적 승공운동을 통해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데 앞장섰다. 특히 문 목사는 광복 이후 북한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면서 공산 당국과 기독교단의 야합으로 흥남 감옥에서 2년 8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하는 등 공산주의 실상을 온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온상인 일본을 공산당의 마수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 진영과 공산 진영 사이에는 이념의 갈등은 물론 군사적 대립이 지속됐다. 공산 진영은 세계 적화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크고 작은 분쟁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셀 수 없이 많은 무고한 인명이 희생됐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공산주의는 동남아시아와 중남미, 아프리카 등지로 확대됐으며, 민주세계의 중심국가인 미국에서조차 좌파 이념이 곳곳에 침투해 맹위를 떨쳤다.


    특히 동남아시아로 확산하는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미국을 중심으로 민주 진영 국가들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하고 희생자가 늘어나면서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여론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문 목사는 제1차 세계 순회 당시인 1965년 6월 25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을 만나 세계 종교를 규합해 공산주의 체제를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 일본 역시 공산주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1922년 7월 15일 창당된 일본 공산당은 1945년 12월 일본 제국의 패망 이후 합법적인 정당으로 등록됐고, 공산주의자들은 각계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공산당은 수십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 특히 1990년 기준으로 50만 명의 당원을 보유하는 등 비집권 공산당의 본거지가 됐다. 1972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하자 일본 공산당은 의원 선거에서 550만 표를 얻어 국회에서 세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일본은 공산당과 사회당 등 좌익세력을 앞세워 미일 동맹의 해체와 함께 주일미군을 철수시키자고 주장하는 등 소련식 적화 야욕에 불타 있었다. 1960년 이후 일본은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대학가와 지식인 계층을 넘어 사회 전반으로 확산한 것이다. 당시 일본은 서독을 누르고 GNP 세계 2위로 세계 정상급 선진국으로 올라섰지만, 대학가는 공산혁명 전위 조직으로 바뀌고, 도쿄와 교토 등 전통적 대도시는 공산당이 장악하면서 평화적 일상에 안주하는 이른바 ‘평화 치매(平和ボケ)’ 상태였다. 그래서 문 목사는 일본 고위층 인사를 만나 소극적 대공 태도를 강력히 경고했다.


    이렇듯 공산당의 사회적 영향력이 확대됨에 따라 일본은 공산혁명을 걱정해야 할 상황에 부닥치게 됐다. 문 목사는 이를 막기 위해 일본 식구와 청년·학생들에게 전면적인 사상투쟁과 승공운동을 전개하도록 지시했다.


    그래서 1968년 4월 1일 일본 국제승공연합이 창설됐다. 일본 승공연합은 승공사상을 앞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구국·구세의 사명감으로 공산주의 세력과 맞서 싸웠다.


    일본의 승공운동은 1968년 6월 대학원리연구회가 창설되면서 더욱 불붙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대학가에 나타난 좌익운동, 특히 적군파가 대학가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시작할 때 그들을 정면으로 맞받아 이념투쟁을 나선 것이 원리연구회였다. 원리연구회는 대학 캠퍼스를 휩쓸던 좌익운동에 정면으로 맞서 이념투쟁을 벌였다. 대학가나 도심에서 공산주의 이론의 모순성을 지적하면서 사상전을 전개한 것이다.


    당시 좌경화한 학생과 지식인들은 1951년 체결된 일본과 미국 간의 안전보장조약을 불평등조약이라며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조약이 1960년에 개정된 이후 1970년에 재차 개정되는 시점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반대운동을 주도하며 그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원리연구회는 공산 세력의 확산을 막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문 목사는 일본이 공산화하면 반공 왕국을 자처하는 한국도 독 안에 든 쥐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교민들을 상대로 반공 강연회를 열고, 승공활동에 대학생들을 앞장세운 것이다. 그리고 1968년부터 3년간은 무슨 모험을 해서라도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반공단체를 조직해 총궐기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그러한 긴박한 시점에서 일본 대학생들은 생명을 걸고 싸워 나가야만 했다. 청년 정예부대를 조직해 대치 국면을 준비하고, 저명인사를 만나 공산당 프락치 분쇄 문제를 의논해 대비계획을 수립했다.


    81c0fc8a1355e65788ee2001460d7128_1736097878_2706.jpg▲ 일본 도쿄 ‘희망의 날’ 만찬회 때, 문선명 목사가 후쿠다 전 총리와 인사(1974.5.7)하는 장면. ©브레이크뉴스 


    81c0fc8a1355e65788ee2001460d7128_1736097907_5647.png▲ 재일교포 모국방문단(1974.4.13). ©브레이크뉴스 


    1968년 7월 20일부터 에리카와 야스에(江利川安榮) 씨 등 세 여성이 문 목사의 지시에 따라 고다이라시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인가 취소 운동을 비롯한 적극적 반공운동을 개시했다. 대학 당국에서 외무성을 통해 압박하려 했지만, 이들은 생명을 걸고 투쟁해 나갔다. 특히 학교 앞에서 강연하는 도중, 조선대학교 직원에게 집단폭행을 당하는 시련 속에서도 ‘조선대학교 인가 취소 운동’을 펼쳤다. 그러면서 니가타 항에서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으로 귀환하려던 조총련계 인사들을 향해서 “북한은 지옥, 지금 어서 속히 도망치십시오!”라고 외치며 목숨을 건 ‘북송 저지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일본 승공연합은 공산당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었던 《공산주의 독본》을 놓고 좌익세력과 이론투쟁을 벌였고, 이들은 내용을 보완하여 수정판을 펴냈지만 계속 밀어붙여 끝내 절판하는 상황까지 끌어냈다. 그리고 공산당의 본질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공개토론을 제안했으나 일본 공산당은 그들의 사상적 취약점을 인식하고 이에 응하지 않았다. 1972년 6월 22일 공산당의 한계를 비판하는 승공 강연이 마이니치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 공산당은 가두선전과 국회 내 자민당 반대 투쟁, 노동자·농민선동 등으로 지하 기반 구축에 혈안이 됐다. 정식당원은 13만~17만 명, 단체행동 가능 수는 280만~350만 명으로 추산됐고, 조총련이 그 선봉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반면 우익 지지자는 150만 명 정도로 내부 분열 상태였다. 그래서 일본을 반공 대열에 참여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간부들이 민단부인회 정기총회와 교포 학생·청년 하계수양회에서 강연하는 등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승공연합 회원이 가장 많았던 때는 1984년으로 750만여 명에 이르렀다.


    특히 1970년대에는 변혁의 물결이 일본 정치계에 몰아쳤고, 선거에서 많은 좌익 후보가 당선됐다. 이들 중에는 공산당 소속 의원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 일본 공산당 당위원장이었던 미야모토 겐지(宮本顯治)는 민주연정을 마음껏 요리하게 됐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이에 승공연합은 모든 노력을 동원해 대표적 공산주의자였던 교토 시장을 1978년 선거에서 낙선시키는 운동을 펼쳤다. 이를 계기로 공산당 지방 정부는 하나둘씩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일본은 공산화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재일교포 교육과 각종 승공대회 개최


    1960년대 일본에 거주하던 한국 교민들은 남한을 지지하는 민단(재일본대 한민국민단)과 북한을 추종하는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으로 나뉘어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승공사상 교육을 통해 교민들이 공산주의에 물들지 않도록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현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문 목사는 조총련계 재일교포를 대상으로 하는 승공 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이들을 남북통일운동에 앞장세우고자 했다. 이를 위해 1971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109명이 내한해 제1회 재일교포 승공 수련회에 참가한 데 이어 수차례에 걸쳐 승공 교육이 개최됐다. 1972년 5월 1일 결성한 국제승공연합 재일본부가 이들 교육에 앞장섰다.


    그러면서 일본 승공연합은 민단뿐만 아니라 조총련의 청년과 지도자들을 교육하고 모국 방문을 추진했다. 조총련계가 한국을 방문한 것은 초유의 사건이었다. 1974년 12월 4일 미국에서 제3차 청년 지도자 교육을 받은 재일교포 210명이 승공 수련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모국 방문이 이뤄졌다. 1975년 3월 11일 조총련 청년 모국방문단 200여 명이 한국을 찾았고, 9월에는 200여 명의 재일교포 청년들이 추석성묘단 이름으로 방한했다. 그들은 광복 후 처음으로 모국을 방문해 가족 친지들과 감격적인 상봉의 장면을 연출했다. 재일교포 고향 방문은 조총련계 재일교포들의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각종 승공대회가 열리고 조직적 승공운동이 전개됐다. 1968년 6월 14일 대학원리연구회 주최 한·일 대학생 승공대회가 한국일보, 조선일보, 대한일보, 코리아 헤럴드사 후원으로 일본 회원 50명을 포함한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교육회관 대강당에서 개최됐다. 6월 15일 서울 미국 공보원 회관에서 ‘1970년대와 아시아의 공산주의 문제’란 주제로 세미나가 있었다. 승공대회는 이후 1989년까지 총 23차에 걸쳐 개최됐다.


    1968년 12월 23일 국제승공연합 주최 제1회 한·일승공대회가 한국 대표 18명, 일본 대표 16명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신문회관 대강당에서 개최됐다. 1970년대를 목전에 둔 시대적 요청과 이데올로기 침식의 위협에 위태로운 극동의 지역적 요청에 부응해 열린 대회였다. 이어 12월 24일 한·일 대표단원이 한국반공연맹 주최 세미나에 참석했다.


    1969년 7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 여론이 강해지면서 미국의 새로운 대아시아 정책인 닉슨독트린이 발표됐다. 닉슨 대통령은 미국의 힘에 의존하지 말고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자국 방어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시아 각국은 공산주의 침투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단결이 절실해졌다.


    1969년 10월 7일 일본 승공운동국민대회가 5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테마치 산케이 홀과 히비야 공원에서 열렸다. 대회 후 평화 행진을 개최했다. 이어서 1969년 11월 29일부터 12월 3일까지 아시아학생승공대회가 와세다대학에서 열렸다. 그리고 1970년 1월 21일 제1회 아시아승공대회가 국제승공연합 주최로 서울 시민회관에서 5개국 대표 50명 등 총 6천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됐다.


    1970년 5월 11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세계반공연맹(WACL) 약진 국민대회가 12개국 6천여 명의 반공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어 9월 14일부터 21일까지 세계반공대회가 개최됐다. 9월 15일부터 17일까지 교토 국제회관에서 제4회 세계반공연맹총회와 제16차 아시아반공연맹대회가 진행됐다. 각국 대표의 보고 및 공동 관심사에 대한 토의 등 회의를 거친 다음, 장소를 도쿄로 옮겨 마지막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1970년 9월 20일 세계반공연맹(WACL) 세계대회가 세계 53개국 250여 명의 대표 등 2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도쿄 무도관에서 개최됐다. 문 목사는 구보키 오사미 일본 협회장에게 대회 개최를 앞두고 WACL 세계대회집행위원장 자격으로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게 했다. 문 목사의 뜻과 승공운동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은 박 대통령은 각료급 한국 대표단을 대회에 파견했다. 이 WACL 대회에 한국 대통령과 일본 총리, 대만 총통, 필리핀 대통령 등 아시아의 민주주의 국가 정상들이 격려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WACL 대회 승리의 기반 위에 한국·일본·대만을 중심한 아시아 안보연대가 결성됐다. 특히 1971년 5월 14일 문 목사는 구보키 회장을 대만에 보내어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게 했다. 1972년 4월 25일 세계승공궐기대회가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3천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이어 한국·일본·대만 국회의원 승공세미나가 1973년 12월 25일부터 30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진행됐으며, 이 기간 중인 26일 아시아승공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됐다.


    1978년, 일본 공산당은 교토부 지사 선거에서 패배했다. 28년간 공산당이 유지해 오던 지사직을 잃은 것이다. 일본 공산당 내부 기록에 따르면, 선거 패배의 원인으로 승공연합의 활동을 꼽았다.


    이 해 일본 승공연합은 강력한 좌익성향의 일본 교사연합을 상대했다. 교사연합에 공산주의가 침투한 결과 교육정책은 큰 혼란을 초래했다. 승공연합은 1952년 좌익 교사연합에서 만든 ‘윤리강령(code of Ethical Practice)’을 대중에게 공개하여 관심을 가지게 했다.


    일본 승공연합 회원들은 1978년 소련, 중국, 북한, 그리고 다른 국가의 첩보 활동을 반대하는 청원 운동에 3천만 명의 서명을 받는 운동을 전개했다. 일본 전역의 3천 개 지역에서 서명운동을 전개하면서 일본 공산당은 1980년대 초반부터 점차 기반을 잃게 됐다.


    일본 승공연합은 자민당 정치인들과 손잡고 반공산주의 운동을 펼쳤다. 기시 노부스케(아베 전 총리의 외할아버지), 나카소네 야스히로, 아베 신타로(아베 신조 전 총리의 부친) 등 쟁쟁한 정치인들이 반공산주의 운동에 함께했다.


    이렇듯 1960년 이후 일본은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하면서 큰 위협이 됐다. 이러한 상황에 가장 먼저 방어에 나선 것이 일본 승공연합이었다. 그리고 문 목사는 통일사상연구원을 창설, 일본 청년 학생들에게 전면적인 사상투쟁과 승공운동을 전개하도록 했다. 그들은 공산주의 이론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면서 공산 세력의 확산을 막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러면서 문 목사는 국제적인 승공 네트워크를 형성해 아시아 지역을 넘어 세계 곳곳에 침투하는 공산 세력을 저지하는 데 앞장을 선 것이다.


    문선명 목사의 승공운동은 아시아에 그치지 않고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로 확산돼 끝내 공산주의 종언을 이끌어냈다. 이로써 승공운동은 반세기를 이어온 냉전체제 종식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문 목사는 공산주의의 중심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회담한 데 이어, 김일성 주석과 역사적인 만남을 통해 남북한이 오랜 대립의 역사를 넘어 화해하고 협력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계속>


    *필자/권오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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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월드 편집국장 등을 거치면서 저자는 오랫동안 취재현장에서 경험하고 발굴한 자료를 중심으로 여러 권의 서적을 펴냈다. 특히 《다 함께 누리는 행복》 《생각 나눔, 공감 그리고 행복》 《마음혁명 비로소 행복한 나를 만나다》 《신가족시대 행복 만들기》 《전환기의 문화인식》 《디지털 문화 읽기》 《전환시대 생존조건》 《일본천황 한국에 오다》 《말 말 말》 《바다경영,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이것만 알면 바른 글이 보인다》 《글쓰기~ 한방에 끝내기!》 《논술 심층면접 한방에 해결한다》 《논술여행》 등의 저서들이 독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종교 관련 저서로는 김수환·정진석 추기경과 혜암·서옹 조계종 종정 등 종교계 원로들을 인터뷰한 《산다는게 뭔고하니》를 비롯해 《종교의 미래를 말한다》 《탈이념 탈종교시대 새로운 선택》 《종교는 없다》 《성인에게 길을 묻다》 《성인에게 듣는 시대정신》 《신(神)의 시크릿코드》 《이웃종교를 위한 변명》 《종교의 품격》 《분노하는 신》 《예수와 무함마드의 통곡》 《영계론, 사후세계를 말한다》 등이 있다. omk200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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