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추적-3]종교자유 박탈하는 일본 정부...“한국산 통일교회 탄압 실상(實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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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 통일교인 12년 5개월 납치·감금 사건 발생...피해자 모임결성 ‘탄원운동’
세계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대한민국에 일본산(日本産)종교들이 들어와 자유로이 포교, 거대한 교세를 확보하고 있다. 한국산(韓國産) 종교인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회)은 일본에 진출, 선교에 성공한 교단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최근 일본 정부 차원에서 한국산 종교에 대한 탄압이 가해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23년 10월 13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회)의 종교법인 해산명령 청구를 했다. 이는 가정연합이 1964년 종교법인 자격을 취득한 이후 처음으로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단체’로 규정,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철퇴를 내린 것. 최근 일본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한국산 종교인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회)이 탄압받는 실상(實相)을 추적 공개한다.(글쓴이 주)
▲ 납치감금 피해 미국 11개도시 항의집회(2010.11.16). ©브레이크뉴스
고토 도루(後藤徹) 씨는 1987년 5월부터 2008년 2월까지 무려 12년 5개월 동안 반대 목사와 가족에 의해 납치·감금을 당했다. 인권 선진국을 자처하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에서 이러한 반인륜적인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을까? 고토 씨의 부모와 형제는 누구의 말을 듣고 가정연합에 대해 나쁜 인식을 하게 됐고, 그것 때문에 장성한 자녀를 그렇게 오랫동안 감금하며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을까? 일본은 과연 딴 세상일까?
가정연합 신자들의 납치·감금, 개종 사건은 정부 당국의 수수방관 속에 법망을 피해 교묘히 진행됐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개인의 기본적 인권(제11조)과 신앙의 자유(제20조)를 보장한 일본의 헌법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할 뿐만 아니라 형법상 체포·감금(제220조), 강요(제223조)에 해당하는 범죄이다.
그러나 이러한 범행은 목사나 좌익세력이 변호사들을 등에 업고 부모나 형제들을 끌어들이는 수법으로 교묘히 진행되다 보니 전혀 단속의 손길이 뻗치지 못했다. 일본 경찰은 피해자들의 납치 피해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하더라도 부모 형제가 나서서 “이것은 가족 내부 문제”라고 해명하면 눈앞에 피해자를 두고도 그대로 철수했다. 결국 1966년 이후 4천여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이들 사례 중에는 쇠 파이프와 전기충격기로 무장한 괴한 20여 명이 돗토리현 가정연합에 난입해 여성 신자를 납치한 뒤 1년 3개월 동안 감금하면서 신앙 포기를 강요한 사건도 있다. 한 청년 신도는 감금 장소인 맨션 6층에서 감시를 피해 탈출하려다가 추락해 중상을 입어 기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해 한국에서 살던 여성 신도(27)가 잠시 친정에 들렀다가 납치돼 절망한 나머지 감금된 맨션의 화장실에서 자살한 비극적 사건도 있었다.
▲ 12년 5개월간 감금당한 고토 도오루 씨.png ©브레이크뉴스
2년 5개월 감금당한 고토 씨 증언
고토 씨는 참혹했던 감금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1963년 11월 2일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에서 고토가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83년 4월 일본대학 이공학부 건축학과에 입학해 1987년 3월 졸업한 뒤 이해 4월에 타이세이건설 주식회사에 입사했습니다.
그리고 1986년 8월 대학 4학년 때 이미 가정연합 신자였던 형의 소개로 입교했습니다. 이어서 여동생도 입교했습니다. 그런데 1987년 5월 무렵, 형이 니시도쿄시의 부모님 집에서 가족들에 의해 감금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가정연합 신앙을 버리도록 설득당했습니다. 주식회사 탭이라고 하는 광고회사 대리점을 경영하고 있는 미야무라라는 사람이 형을 설득하는 데 나섰습니다.
당시 미야무라 씨는 일본 예수그리스도교단 오기쿠보 영광교회의 모리야마 목사와 협력하며 가정연합 신자의 부형으로부터 자녀들의 탈회 의뢰를 받고 있었습니다. 미야무라 씨가 조직했던 부형 등의 모임을 ‘미즈구키 회’라고 했습니다. 이 모임은 자신의 아이 탈회에 성공한 부형이 다른 부형 등의 탈회를 돕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형은 가정연합에서 탈회한 후 미야무라 씨가 경영하는 탭 회사에 취직해 그의 활동을 돕게 됩니다.
1987년 10월, 나는 형의 요청으로 신주쿠 게이오 플라자 호텔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안에는 부모님이 대기하고 있었고, 나는 형으로부터 신앙을 버리도록 설득을 당했습니다. 주변을 보니 방문은 자물쇠로 고정돼 있어 방에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일방적으로 감금된 것에 분개하여 부모님과 형과 맞붙어 싸웠으나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 후 미야무라 씨가 가정연합 전 신자 몇 사람을 데리고 와서 탈회를 강요당했습니다. 약 1주일 후 호텔에서 나와 스기나미구 오기쿠보의 한 맨션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대로는 밖에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신앙을 버린 것처럼 해서 탈출 기회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11월 하순 무렵, 부모님과 형에 의해서 감시를 당하는 중에 오기쿠보 영광교회의 일요일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탈출하여 가정연합으로 도망을 오게 됐습니다.
나는 다시 감금당하는 것이 무서워 타이세이건설을 퇴사한 뒤 교회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1988년 말 무렵 여동생이 부모님과 형에 의해 납치되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1991년, 형은 도쿄 지방법원에 가정연합을 고소하여 손해배상청구소송(이른바 ‘청춘을 돌려달라는 재판’)을 제기하고, 가정연합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냈습니다.
나는 1992년 8월 가정연합의 여성 신자와 한국 서울에서 거행된 3만 쌍 국제합동결혼식에 참가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후에 가족들에 의해서 감금되고 가정연합에서 탈회하게 됐습니다.
1993년쯤 형이 결혼했습니다. 형수는 친족에게 감금되어 미야무라 씨와 일본 동맹 기독교단 니이즈복음기독교회의 마쓰나가 야스모토 목사의 설득으로 탈회한 가정연합 전 신자입니다. 그녀도 1991년 니가타 지방법원에서 ‘청춘을 돌려달라는 재판’을 제기해 배상금을 받아냈습니다.
나는 1995년 8월 가정연합의 여성 신자와 함께 한국 서울에서 행해진 36만 쌍의 국제합동결혼식에 참가했습니다.
1995년 9월 11일 니시도쿄시의 자택에 귀가했을 때 부모님과 형, 마당에 잠복하고 있던 낯선 남성에 의해 강제로 차에 태워졌습니다. 왜건 차에는 우리 가족과 낯선 사람들이 타고 있었고, 낯선 남성이 운전하여 니가타로 향했습니다. 도중에 화장실에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아 휴대용 비닐에 일을 보았습니다.
니가타의 맨션 방은 모든 창이 잠겨져 있었습니다. 부모님, 여동생, 형수가 상주하면서 탈회를 강요했습니다. 형은 ‘이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희생을 하더라도 결착을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마쓰나가 목사도 종종 방문하여 설득을 시도했습니다.
1995년 12월 말 신앙을 버린척하며 탈회 신고서도 썼으나, 1987년 첫 번째 감금 당시 일 때문에 감금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1997년 6월 22일, 아버지가 65세에 암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니시도쿄시의 자택에서 아버지의 시신과 대면했습니다. 그 후 도내의 맨션 3층, 4층의 방에 감금됐습니다. 현관문은 특수열쇠로 잠가서 탈출은 불가능했습니다.
1997년 12월 말쯤 어머니와 형 부부, 여동생, 낯선 남성 등에 의해서 재차 차에 태워져 오기쿠보 플라워 홈이라고 하는 맨션의 804호실에 감금됐습니다. 현관문은 안쪽으로부터 쇠사슬과 작은 자물쇠로 열리지 않게 엮어져 있었고 모든 창은 전용의 열쇠에 의해서 잠겨졌습니다. 어머니와 형, 여동생, 형수가 나를 감시했습니다.
2년 이상 신앙을 버린 것처럼 했으나 감금이 계속돼 인내의 한계를 넘게 됐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가족이 감금이나 탈회를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부당하고, 인권침해라고 강하게 항의했습니다. 그 후에도 탈출을 시도했으나 형이 힘으로 나를 붙잡았습니다.
1998년 1월 초순부터 9월까지 미야무라 씨가 전 신자 등을 데리고 와서 탈회를 강요했습니다. 미야무라 씨는 ‘나는 너를 감금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가족이 보호하고 있다. 나가고 싶으면 가족에게 말하라.’라고 했습니다. 여동생은 ‘이런 상태라면 일생 이대로니까 각오해.’라고 협박했습니다.
나를 포함해 가족의 몇 사람이 인플루엔자에 걸렸을 때도 나는 병원에 가지 못한 채 가족이 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먹었습니다.
미야무라 씨는 서서히 나를 찾아오는 횟수가 줄어들었으나, 그가 그동안 나를 찾아온 것은 73회였습니다. 2000년 1월 무렵 신문을 읽을 수 있게 됐으나 6월 무렵부터는 그것도 끊어졌습니다.
2000년 2월 나는 불안감이 몰려와 현관으로 돌진하며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가족에게 ‘경찰을 불러라.’ ‘변호사를 세워서 고소할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가족은 이불로 나를 감싸면서 입을 막았습니다. 나는 숨을 쉴 수 없게 되어 질식할 것 같았습니다. 이때 오른쪽 손가락을 다쳐 2~3개월간 고생했습니다.
나는 더욱 엄중한 감금 상태가 계속되자 허탈감과 절망감에 빠져들었고, 결국 힘으로 탈출하는 것을 단념했습니다.
2004년 4월 나는 21일간의 단식 투쟁을 단행하며 감금에 대해 항의했습니다. 이때 형수가 나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때리는 폭행이 9월까지 반복됐습니다. 형수도 손바닥을 다쳐 장기간에 걸쳐 오른손 엄지에 파스를 붙이고 있었습니다. 단식 투쟁의 후반에는 보행이 어려워 화장실에서 서서 소변을 볼 수 없었습니다.
2005년 4월 한국어 교재를 가져다 달라는 요구가 거부당하자 다시 21일간 단식 투쟁을 결행했습니다. 스트라이크가 끝나도, 그로부터 7개월간은 허술한 식사밖에 내 주지 않았습니다.
감금 중에 무좀이 생겨 처음에는 약을 주었지만, 2006년경부터는 약도 끊어 오른발 엄지발가락이 변형됐습니다.
2006년 4월 노트를 가져오도록 요청했으나 가족이 거부하면서 30일간의 단식 투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단식이 끝난 뒤에는 식사를 제공받지 못했습니다. 내가 간절히 부탁한 끝에 다음날부터 미음과 포카리스웨트를 주었습니다. 이러한 유동식만의 식사가 70일간 계속되자 나의 몸은 야위어지고, 아사 직전까지 갔습니다. 나는 가족의 눈을 피해 식사 준비를 위해 물에 담겨 있는 생쌀을 조금씩 빼내서 먹으며 아사를 면했습니다.
7월 초순쯤 보통 식사를 달라고 부탁했으나 4개월간은 죽만 주었고, 보통 음식이 제공된 것은 그 후였습니다.
9월 형수가 텔레비전의 안테나 케이블을 가져가면서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도 볼 수 없었습니다.
2007년 11월 무렵 형수는 ‘이 방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돈이 드는지 생각해 보라.’라면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감금이 장기화하면서 경제적으로 힘들어지고, 가족 사이에서도 감금을 더 이상 계속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갈렸습니다. 그런데도 최소한 2명이 나를 계속 감시했습니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4시께, 형 부부와 어머니, 여동생이 ‘가정연합의 잘못을 검증하는 데 관심이 없으면 즉각 나가라.’라고 하며 돌연 퇴거를 명했습니다. 나의 몸은 현저하게 쇠약해졌고, 지갑 등 소지품은 돌려받지 못한 채 파자마를 입은 채로 현관 앞의 콘크리트 복도에 던져졌습니다. 그 후 구두를 던져 주었습니다.
나는 교회 본부로 향하는 도중, 파출소에서 전철 요금을 빌리려고 했으나 부랑자로 오해받아 돈을 빌릴 수가 없었습니다. 우연히 만난 가정연합 신자에게 돈을 빌려 택시를 타고 교회 본부에 도착했습니다.
그날 한밤중에 병원에 가서 영양실조라는 진단을 받고 긴급히 입원했습니다. 입원 당시에는 혼자 걸을 수 없었으나 재활훈련을 하면서 지팡이를 사용하지 않고 걸을 수 있게 되면서 3월 31일에 퇴원했습니다.
나에게 신앙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12년 5개월간에 걸쳐 감금하면서 집단으로 정신적·육체적인 학대를 한 것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입니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뿌리로부터 부정당하고, 인생의 귀중한 기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냈습니다.
그런데 감금에 관여한 가족이나 미야무라 씨는 일체 반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미야무라 씨는 오기쿠보 플라워 홈의 현관문이 작은 자물쇠 등으로 잠겨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내가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감금하는 측의 잔학한 행동을 눈앞에서 보면 볼수록 가정연합을 반대하고 있는 미야무라 씨나 내 가족이 악의 편에 서 있음을 느끼게 됐습니다. 그래서 나는 죽어도 그들과 같이 악의 편에 서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면서, 부당한 감금 현장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자유의 몸이 되어 이 악질적인 인권침해를 만방에 호소하겠다는 강한 사명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현대 국가에 이러한 잔학무도한 행위가 다시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만천하에 확실히 드러내기를 진심으로 고대합니다.”
▲ 2010년 3월 23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여성 통일교인 70여명이 일본에서 자행되는 납치, 감금에 대한 대책 기자회견을 갖고 주한 일본대사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브레이크뉴스
불법 감금 사태의 대책을 위한 피해자 모임 결성
고토 씨의 납치·감금의 후유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납치될 당시 키 182㎝의 건장한 청년이었던 고토 씨는 감금에서 풀려난 직후 몸무게가 39㎏으로 뼈만 남은 영양실조 상태였다. 혼자 걷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는 감금에서 풀려난 직후 깊은 기도 속에서 “반격 시작이다!”라고 분노에 찬 하나님의 외침을 들었다. 그리고 감금당했을 때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를 다음과 같이 달력에 기록해 놓았고, 그것을 증거물로 법원에 제출했다.
“사탄의 공격을 기꺼이 받아 주겠다. 반드시 되갚아 주겠다. 절대 손해 보지 않겠다. 원리는 절대적이다.”
고토 씨는 감금에서 풀려 나온 직후 긴급히 입원했고, 그의 건강 상태를 보고 놀란 담당 의사는 2008년 2월 인근 경찰서에 통보했으며, 그 역시 6월에 변호사를 통해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그러나 경찰은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고, 2009년 12월 도쿄 지방재판소는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그 결과 형사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피의자는 형벌을 피하게 됐다. 사법 당국이 인권을 외면한 판결을 내리면서 내외에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고토 씨는 2011년 1월에 형 부부와 여동생, 개종 활동가 등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래서 2014년 1월 28일 도쿄 지방재판소 첫 공판에서 승소했다. 담당 판사는 고토 씨의 납치·감금에 관련된 직업적 개종 활동가 미야모토 다카시 씨와 친족 3명의 불법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어 483만 엔의 손해배상을 명하였다. 하지만 변호인단은 배상 규모가 예상보다 피해를 보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항소했다.
민사 항소심은 도쿄 고등재판소에서 진행됐다. 담당 판사는 이해 11월 13일 판결문을 통해 1심 판결 전체를 인정함과 동시에 니이즈복음기독교회 마쓰나가 야스모토 목사가 행한 불법 행위인 ‘납치·감금을 통한 강제 개종’을 추가로 인정하여 고토의 형 부부와 여동생 등 3명에게 2천200만 엔(약 2억 2천만 원)의 손해배상 지불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마쓰나가 목사에게는 “(고토 가족에 의해 고토의) 자유를 제약하고 통일교 탈회를 설득하는 것을 방조했으며, 고토가 통일교를 버리도록 강요했다.”라며 1천100만 엔의 배상을 명령했다. 판결문에는 처음으로 ‘납치’와 ‘강요’라는 표현이 명기됐다. 그리고 ‘가족 대화’를 명분으로 개종을 위법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신앙의 자유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그리고 2015년 9월 29일 최고재판소에서 승소가 확정됐다. 이 재판은 이후의 납치·감금, 강제 개종이 불법임을 최고재판소가 판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반전의 기회가 됐다.
▲ 고토 도오루(後藤徹) 전국납치감금 강제개종피해자의 회 대표. ©브레이크뉴스
특히 납치·감금 사건이 국내외에서 큰 파장을 일으키자 2000년 4월 20일 중의원 결산행정위원회에서는 히노기타 진 자민당 중의원 의원이 강제 개종 사건이 인권침해와 신앙의 자유에 저촉되는지 질문을 했다. 그에 대해 다나카 세쓰오(田中節夫) 경찰청 장관은 “납치·감금, 폭행 상해 등의 사건에 대해서는 비록 부모와 자식, 친족 사이라고 해도 예외 없이 법에 근거해 엄정하게 대처하겠다.”라고 대답했다.
한편 미국 국무부 민주주의·인권·노동 담당국이 1999년부터 ‘국제 종교자유 연차 보고서’에서도 이 사건을 언급했다. 즉 “가정연합 신자는 신자에 대한 강제 개종에 관한 문제 제기에 경찰이 대응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또 피해자가 가족들에 의해서 납치되었을 때도 경찰이 법을 집행하지 않아 가정연합 신자는 장기간에 걸쳐 속수무책의 감금을 당하고 있으며, 감금하는 개인을 경찰이 단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라고 기록했다. 일본에서 신앙의 자유가 제한되고 강제 개종이 방치된 상황을 우려하면서 대책을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2009년 ‘국제 종교자유 연차 보고서’에도 “12년 이상 본인의 의사에 반해 가족에게 구속돼 있던 가정연합 신자가 2008년 2월 10일에 방면돼 가정연합 본부로 돌아왔지만 아무도 기소되지 않고 수사도 되지 않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고토 씨는 2010년 1월 8일 지바현 우라야스시의 일심 특별교육원에서 ‘전국 납치·감금·강제 개종 피해자 회’ 결성대회에서 대표로 추대됐다.
그리고 국제사회와 연대도 추진했다. 피해자 모임은 국내외 정치인과 정부 관계자, 인권단체 등에 피해 사실을 알리고 협력을 요청했다. 특히 미국과 한국 등에서는 2009년부터 일본인 피해자들이 강연회를 통해 납치·감금 실태를 폭로하면서 여론의 호응을 얻기도 했다.
고토 대표는 요즘도 일본은 물론 한국, 미국 등 전 세계를 다니며 강제 개종과 납치·감금의 근절을 위해 뛰고 있다. 그는 “이런 행태는 특정 종교 간의 갈등 문제이기 전에 기본적 인권의 문제”라면서 “일본 사회가 제대로 된 인권 사회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현안”이라고 강조했다.
이렇듯 일본이 종교자유를 박탈하는 대표적 국가로 전락한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제 일본의 지성인들이 반종교적 행위를 일삼고 있는 좌익세력과 일부 개신교 목사들의 행태를 척결하기 위해 적극 나서야 할 때다. <계속>
*필자/권오문 작가
세계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월드 편집국장 등을 거치면서 저자는 오랫동안 취재현장에서 경험하고 발굴한 자료를 중심으로 여러 권의 서적을 펴냈다. 특히 《다 함께 누리는 행복》 《생각 나눔, 공감 그리고 행복》 《마음혁명 비로소 행복한 나를 만나다》 《신가족시대 행복 만들기》 《전환기의 문화인식》 《디지털 문화 읽기》 《전환시대 생존조건》 《일본천황 한국에 오다》 《말 말 말》 《바다경영,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이것만 알면 바른 글이 보인다》 《글쓰기~ 한방에 끝내기!》 《논술 심층면접 한방에 해결한다》 《논술여행》 등의 저서들이 독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종교 관련 저서로는 김수환·정진석 추기경과 혜암·서옹 조계종 종정 등 종교계 원로들을 인터뷰한 《산다는게 뭔고하니》를 비롯해 《종교의 미래를 말한다》 《탈이념 탈종교시대 새로운 선택》 《종교는 없다》 《성인에게 길을 묻다》 《성인에게 듣는 시대정신》 《신(神)의 시크릿코드》 《이웃종교를 위한 변명》 《종교의 품격》 《분노하는 신》 《예수와 무함마드의 통곡》 《영계론, 사후세계를 말한다》 등이 있다. omk200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