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종교는 왜 사랑을 외치면서 분열과 전쟁을 일삼는가?
경전 정신으로 다시 인류 미래를 열어야 할 종교!
나는 왜 종교인이 됐는가? 인류의 절대다수가 종교에 목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신이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고 주관한다면 왜 이 세상은 갈등과 전쟁이 끊이질 않는가? 과연 갈가리 찢어지고, 갈등과 분쟁을 일삼는 종교, 나는 제대로 믿고 있는가?
《왜 종교에 목을 매는가?》(권오문 지음, 울림과세움 발행)는 절대다수의 인류가 믿고 있는 종교가 왜 길을 잃고, 본연의 모습에서 이탈하게 됐는지 구체적으로 탐구하면서 종교의 본질 회복을 위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아울러 이 책은 ‘종교의 본질 회복과 미래를 향한 성찰’이라는 부제가 말하듯이 오늘날 벼랑 끝에 내몰린 종교계가 안고 있는 기복화와 세속화, 파벌주의, 비전 상실 등 종교 현안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그 대안을 모색하고, 격변기를 맞이한 종교의 미래에 대해 집중 탐구하고 있다. 이는 오랜 역사를 거쳐 오면서 두꺼워진 위선과 탐욕의 그림자를 과감히 거둬내어 종교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 위한 성찰의 과정이자, 신이 떠난 종교, 신이 함께할 수 없는 종교로 추락한 암담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진실한 종교인들의 몸부림을 반영한 것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종교의 근원인 신의 참모습을 밝히고, 위대한 성인들의 정신을 회복함으로써 전대미문의 격변기를 헤쳐 나가야 할 종교의 존재 이유를 다시 찾고, 참된 신앙 길을 갈망하는 종교인들의 염원에 응답하고자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자신과 다른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이웃 종교인에게 서슴없이 돌을 던지고, 청빈과 무소유를 설파하던 성직자들이 세속의 욕망에 깊이 연루된 사건들을 수없이 만나게 된다. 특히 갈릴레이를 심판했던 중세의 종교재판에서 보듯이 종교는 종종 진리를 향한 인간의 자유로운 탐구를 억압하고, 낡은 교리의 성벽 안에 자신을 가두는 어리석음을 반복해 왔다.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분열과 갈등, 특히 십자군 전쟁, 30년 종교 전쟁은 물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테러와 분쟁의 이면에는 언제나 타자를 악마화하고 증오하는 왜곡된 종교적 열정이 도사리고 있다. 이처럼 인류를 지배해 온 종교는 구원의 빛과 파괴의 어둠이라는 두 얼굴을 동시에 가진 존재, 즉 야누스와 다름없다. 그런데도 종교에 목매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직도 수많은 사람이 종교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이 현실에서, 결국 이것이 길을 잃고, 신이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종교가 다시금 본질을 회복해야 하는 이유이다.
종교의 길은 아주 단순하다. 인간은 누구나 종교적 심성을 지니고 있다 보니 끊임없이 궁극적 실재인 신(神)을 찾았고, 진리를 탐구해 왔다. 그리고 성인들은 일찍이 천리대도와 인간의 본성을 깨우치고, 사랑과 자비, 인(仁), 그리고 진리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그런데 종교의 목표는 자기를 비우고 남을 먼저 섬기라는 성인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누구나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임에도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종교 지도자가 오로지 탐욕과 신격화 등 자기 중심주의에 빠져 종교를 황폐화하고 말았다.
저자는 “어쩌다 신을 향한 순수한 믿음이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기복 신앙, 집단이기주의로 변질됐는가?”, “사랑을 내세우는 종교가 어떻게 수많은 테러와 전쟁의 배경이 됐는가?”라는 송곳 같은 질문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참된 종교, 진실한 종교인의 길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종교의 본질을 향한 이러한 질문은 신앙에 대한 공격이나 냉소적인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시대적 책임감에서 출발하는, 가장 진지하고 성숙한 신앙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특히 전대미문의 전환시대를 맞아 가치관의 표류로 모두가 방향을 잃고 헤매는 상황에서 종교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그 해답의 실마리는 모든 종교의 시작점, 즉 위대한 성인들의 가르침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개인의 소원성취를 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인들이 꿈꿨던 정의롭고 자비로운 세상을 실현하는 데 종교인들이 힘을 모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종교의 역할은 없을 것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종교의 본질 회복과 아울러 종교의 미래에 대해 전망하고 있다. 우선 첨단과학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낡은 세계관에 스스로를 가둔 제도 종교가 어떻게 속절없이 표류하는 지를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물질주의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삶의 의미를 환히 비춰주던 등대의 역할을 상실한 채, 망망대해를 함께 떠내려가는 난파선과 다름없는 종교의 현실과 ‘종교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상황을 진단한다.
그러나 이 책은 종교가 과학기술 문명시대와 공존하며 인류의 더 깊은 영적 갈증에 응답할 수 있는 미래 종교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이 주도하는 첨단과학기술 시대에 종교가 무엇이 달라지고, 어떻게 종교 행위가 이뤄질 것인가에 주목하고 있다. 종교는 궁극적 실재인 신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문화체계인 만큼 요즘처럼 일요일에 대규모의 예배나 법회가 이뤄지기보다는 AI를 통해 정보를 얻거나 인터넷을 통해 연결, 각자 가정에서 기도나 명상을 통해 신과의 만남의 시간을 갖는 쪽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
그리고 앞으로 종교는 더 이상 스스로를 고립시키던,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닫힌 종교’의 형태를 띠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특정한 교리를 믿고, 정해진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사람만이 ‘우리’가 될 수 있었던, ‘우리’와 ‘그들’을 가르던 배타적인 종교는 점차 그 힘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은 ‘벽 없는 교회’, 즉 열린 네트워크 형태의 영성공동체가 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즉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고요히 명상하고, 불자이면서 예수의 가르침에서 깊은 영감을 얻는 영성공동체가 주목받게 될 것이란 점이다. 이는 무엇을 ‘믿는가’가 아니라, 어떤 ‘가치’를 지향하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 때문이다. 결국 종교인이나 비종교인, 더 나아가 다양한 철학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까지 자유롭게 모이고 흩어지며 서로에게서 배우고 영감을 주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기에 오히려 더 자유롭고 깊은 영적 연대, 이것이 미래 영성공동체의 모습이라고 강조했다.
저자는 종교가 제도와 교리를 넘어서면서 신앙생활 역시 ‘특별한 종교 행위’의 영역에서 ‘일상적인 삶의 방식’의 영역으로 온전히 되돌려 놓을 것으로 내다봤다. 오랫동안 우리를 옭아매던 ‘성(聖)’과 ‘속(俗)’의 이분법적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삶의 모든 순간이 바로 거룩한 진리를 체험하고 실현하는 살아있는 수행의 장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웅장한 성전 안에서만 신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침 식탁에서 나누는 가족과의 정겨운 대화 속에서, 분주한 직장에서 동료와의 진실한 협력 속에서, 그리고 저녁노을이 짙어지는 공원을 산책하는 고요한 순간 등 이러한 일상의 모든 조각 속에서 경이로운 신의 현존을 느끼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인류가 찾아온 신은 더 이상 특정 종교의 신이 아니라 모든 존재 안에 내재하며 우리를 더 큰 사랑과 정의, 그리고 평화로 인도하는 우주적이고 천주적인 신이기 때문에 신앙의 궁극적 목표는 다름아닌 신과 나 사이의 살아 있는 관계의 회복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종교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리나 제도, 의식, 성직자 등을 뛰어넘어 우리 각자가 궁극적 실재인 신과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길 외에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가치 부재 시대를 맞아 ‘신 중심의 가치관’에 주목하고 있다. 비인간화돼 가는 현대문명, 특히 서구 문명이 신을 상실한 채 상대적 가치관에 매몰되면서 위기에 처한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모든 종교가 추구해 온 것처럼 신 중심의 ‘절대 가치’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첨단과학 시대에 현대인의 영적 공허를 채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냉혹한 세상 속에서 신 중심의 절대 가치관을 끝까지 지켜낼 때 물질주의 속에서 잃어버린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다시 던지고, 소비주의에 중독된 현대인을 감사하는 존재로 변화시키게 될 것으로 저자는 보고 있다.
■ 차례
책머리에 / 왜 종교의 본질 회복을 말하는가?
프롤로그 / 경전 정신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전환기의 종교
제1부 길 잃은 종교, 무엇이 문제인가?
제1장 왜 사람들은 종교에 매달리는가?
1. 인간의 종교적 본능과 기복신앙의 뿌리
2. 모순된 세상, 새 희망을 찾는다
3. 영적 양식을 갈구하는 종교인들과 종교 지도자의 덫
4. 과연 이 땅에 하늘나라 실현은 가능한가?
제2장 맹신·기복화한 종교, 그 검은 그림자
1. 왜 이성 대신 맹신을 요구하는가?
2. 기복주의가 드리운 종교의 검은 그림자
3. 축복과 은총의 참된 의미
4. 왜 믿음보다 실천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제3장 인류 역사에 드러난 종교의 두 얼굴
1. 종교 간의 갈등과 집단이기주의
2.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분쟁의 역사
3. 종교 권력화와 자기중심주의 유혹
4. 말과 행동이 다른 종교인들
제4장 기독교 역사, 그 이중성과 왜곡
1. 성경 형성 과정과 상충하는 구절
2. 소크라테스 철학이 바탕이 된 기독교 교리의 변질
3. 십자군 전쟁: 교황의 탐욕이 부른 이름뿐인 성전(聖戰)
4. 개신교의 등장과 갈등, 그리고 교파 난립
제5장 형식화의 덫: 교리, 율법주의, 정통·이단 논쟁
1. 종교 교리 형성 과정, 교권 투쟁의 빛과 그림자
2. 정통과 이단: 누가, 무엇을 위해 경계를 나누었는가?
3. 종교 본질을 떠난 의식화와 율법주의 함정
4. 초대교회의 순수성과 제도화된 오늘의 교회
제6장 종교 역사에 드러난 성직자들의 민낯
1. 성직자는 평신도와 무엇이 다른가?
2. 신의 대리자인가, 고독한 영혼을 위한 목자인가?
3. 종교 지도자의 타락과 영적 파산의 역설
4. 성직자의 길: 신도 한 분, 궁극적 진리도 하나!
제2부 전환기의 종교, 새길을 찾다
제1장 종교, 잃어버린 본성 회복을 위한 여정
1. 인간은 왜 종교적 존재인가?
2. 참된 자아와 잃어버린 본성 회복의 길
3. 종교의 본질, ‘나’보다 ‘남’을 위한 삶
4. 인류공동체의 꿈: 누구나 행복한 세상
제2장 성인의 가르침, 경전 정신에서 벗어난 배경은?
1. 종교는 왜 경전 정신에서 이탈했나?
2. 기독교 형성 과정에서 왜곡된 예수의 참된 정신
3. 붓다의 가르침: 깨달음에서 변질된 기복신앙으로
4. 평화의 종교 이슬람은 왜 칼을 들게 되었나?
제3장 신은 왜 침묵하는가?
1. 신의 부재 시대: 현대문명은 어디로 향하는가?
2. 인간의 자유의지: 신이 간섭할 수 없는 영역
3. 인류의 위기: 신·인간·자연 관계의 재발견
4. 신이 떠난 종교, 신이 함께할 수 없는 종교
제4장 성인(聖人)에게 다시 길을 묻다
1. 성인들이 오늘, 이 땅에 다시 강림한다면?
2. 예수가 본 외식하는 교회: 2천 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3. 주체적 신앙인으로: 축복과 은총의 수혜자를 넘어
4. 왜 지금 신 중심의 절대가치관이 필요한가?
제5장 첨단과학 시대, 종교의 미래
1. 인공지능(AI) 시대, 길 잃은 종교
2. 물질 중심 시대: 신 중심의 가치관을 회복하려면?
3. 제도와 교리를 넘어선 미래 종교의 전망
4. 종교 이후의 시대를 말하는 까닭은?
제6장 종교의 본질을 말한다
1. 종교 본질에 대한 동서고금의 다양한 시선
2. 결국 성인 정신의 회복이 답이다
3. 올바른 믿음의 조건, 참된 종교인의 자세
4. 종교의 본질: 신·인관계 회복을 위한 과제는?
에필로그 / 참된 종교, 종교인의 길
■ 본문속으로
종교의 길은 아주 단순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종교적 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궁극적 실재인 신(神)을 찾았고, 진리를 탐구해 왔습니다. 그리고 성인들은 일찍이 천리와 본성을 깨우치고, 사랑과 자비, 인(仁)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과 신격화 등 자기 중심주의가 종교를 황폐화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종교의 목표는 자기를 비우고 남을 먼저 섬기라는 성인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누구나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길 잃은 종교가 다시금 본질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6쪽)
종교가 본질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개인과 신의 직접적인 관계를 그 어떤 중개자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고통받는 신도들에게 “무조건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과의 관계는 맹신이 아닌, 치열한 성찰 속에서만 정립될 수 있습니다. (37쪽)
지난 2천 년 기독교 역사에는 교황의 반종교적이고 비윤리적 행태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역대 교황들은 베드로의 후계자,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자처했지만, 그 가운데는 누가 보아도 자질이 의심스러운 교황들이 등장합니다. 특히 교황은 세속적 권력과 재정을 손에 쥐고 있다 보니 교황직을 이용해 온갖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행태를 보여주었습니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6세(896)부터 스테파누스 7세(928~931)까지 32년 동안 14명이 교체될 만큼 교황들이 세속적 사건에 휘말렸습니다. 평균 재위 기간이 2년 반이라는 것은 그만큼 교황직을 놓고 쟁탈전이 치열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니파키우스 6세는 재임 2주 만에 독살을 당했습니다. 전임 교황 레오 5세(903)를 투옥해 독살한 교황 크리스토포루스(903~904)는 몇 달 후 전임자와 같은 처지에 내몰리게 됩니다. 크리스토포루스를 살해하고 등극한 교황 세르기우스 3세(904~911)는 로마 집정관의 딸 마로치아와 타락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마로치아의 언니 테오도라의 지지로 선출된 교황 요한 10세(914~928)는 5세의 어린아이를 랭스의 대주교로 임명하는 등 부정을 저지르면서 마로치아에게 축출돼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마로치아의 사랑을 받아 교황이 된 레오 6세(928~929)는 다른 여인을 사랑했다가 마로치아에게 암살당했습니다. 마로치아와 교황 세르기우스 3세의 아들이었던 교황 요한 11세(931~935)는 10대의 나이로 등극했지만, 정적들에 의해 독살당합니다. 그리고 마로치아의 손자로서 18세에 등극한 교황 요한 12세(955~964)는 살인, 성직 매매, 서약 위반, 음행 등의 범죄 행위로 종교회의에 부쳐져 퇴위당했지만, 이를 인정치 않고 자신의 퇴위에 동조한 반대파들을 잔혹하게 처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부녀와 간통하다가 습격을 받은 뒤 며칠 후 사망했습니다. (165쪽)
인간과 우주의 본체이자 근원인 신은 과연 누구일까요? 대부분의 유일신교는 그분을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자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절대자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그 절대자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저마다 다른 대답을 내놓으며 혼란을 드러냅니다. 이는 그 어떤 종교도 궁극적 실재의 참모습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신에 대한 개념이 이처럼 불분명한 탓에 종교는 각자의 입맛에 맞게 신을 재단하고 왜곡해 왔습니다. 같은 신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중동의 종교들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의 신은 온 인류를 품는 보편적인 사랑의 신이 아니라, 오직 ‘우리 편’만을 지키고 축복하는 부족의 신으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신을 만나기도 전에 자신들의 탐욕으로 빚은 우상에 ‘신’이라는 이름을 도용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종교의 진정한 목적은 단 하나, 궁극적 실재인 신을 바로 알고 신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 실재는 오직 한 분이며, 진리 또한 하나이기 때문에 한 분의 신 안에서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제 자신이 속한 교리의 감옥에서 벗어나 누구나 승인하는 보편적이고 궁극적 진리를 깨닫고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255쪽)
만약 성인들이 오늘날의 세상에 다시 온다면, 그가 가장 먼저 찾아갈 곳은 어디일까요? 수천억 원을 들여 지은 화려한 대형 교회일까요? 아니면 화려하고 웅장한 유명 사찰의 대웅전일까요? 머리 둘 곳조차 없이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던 예수의 삶을 기억한다면, 그는 오히려 화려한 성전이 아닌 가장 가난한 동네의 쪽방촌이나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난민촌의 한가운데에 서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기념한다며 세워진 거대한 교회와 지도자들을 향해, 2천 년 전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전상들을 내쫓았던 것과 같은 준엄한 분노의 일갈(一喝)을 터뜨릴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왕궁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던 붓다가 온통 황금으로 뒤덮인 거대한 불상과 자신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수많은 사람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그는 아마도 “내가 가르친 것은 저 차가운 돌덩이에 절을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라고 깊이 탄식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성인들이 오늘날의 종교를 향해 던지는 첫 번째 가르침은 이처럼 ‘외적인 형식’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거대한 교회와 사찰, 복잡하고 정교한 교리, 그리고 화려하고 장엄한 예배 의식들이 오히려 신과 진리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리라고 봅니다. 역시 그들은 종교라는 제도와 의식들로 인해 자신들의 숭고한 가르침과 살아있는 정신을 잃어버렸음을 질타할 것입니다. (260쪽)
오늘날 종교가 모순과 한계를 보이는 것은 각 종교가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집단이기주의에 매몰돼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다가 대부분의 종교는 구원이란 인간이 주체적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선물, 즉 축복이나 은총일 뿐이라고 수동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이 인간에게 자율성을 부여한 것은 인간 스스로 인간다움을 실현하고, 인간의 고귀한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큰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의 본질은 나에게 내재한 신성(神性)을 회복함으로써 참 자유와 해방을 성취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주체적인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유아기적인 의존의 상태를 벗어나 신의 동반자이자 동역자라는 성숙한 인간으로 바로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한 신의 가장 깊은 뜻입니다. 따라서 신의 뜻을 그저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신의 위대한 꿈을 이 땅 위에 함께 실현해 나가는 창조의 파트너가 되는 것, 이보다 더 영광스럽고 가슴 벅 찬 부르심은 없을 것입니다. (275쪽)
AI가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의 거대한 파도는 종교계에도 거센 변혁의 바람을 몰고 왔습니다. 생성형 AI가 종교계에서도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그야말로 충격과 경탄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최근 스위스의 한 교회는 AI 모델을 사용해 예수 그리스도를 재현하며 전통 신앙의 심장부에 첨단기술을 접목하는 과감한 실험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스위스, 독일,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는 AI가 이끄는 예배가 열리고 있습니다.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성베드로 성당에서 2024년 8월 말부터 약 두 달간에 걸쳐 예배당 고해성사실에 AI 예수를 설치하는, 일명 ‘기계 속의 신(Deus in Machina)’ 프로젝트가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진행됐습니다. 루체른 응용과학대학교와 협력해 시도한 이 도발적인 프로젝트는 종교와 기술 융합의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한 목적에서 추진됐습니다. AI 예수는 모니터 화면에 실감 나는 ‘아바타’ 형태로 나타나 방대한 신학 텍스트를 학습한 것을 바탕으로 100개 이상의 언어로 방문객들과 실시간 대화를 나눴습니다. 음성 인식은 미국의 AI 연구소인 ‘오픈 AI’에서 개발한 자동 음성 인식 모델 ‘위스퍼’로, 답변은 다중 언어 변환기인 챗지피티-4o로 구현하고 생성했습니다. 두 달 동안 1천 명 이상이 이곳을 방문해 진정한 사랑과 내세, 전쟁과 현실 세계의 고통, 신의 존재, 동성애 등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심오한 주제를 놓고 AI 예수와 얼굴을 마주하고 직접 대화를 나눴습니다. 방문객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AI 예수와 대화를 나누며 깊은 영적인 경험을 했다.”라는 놀라운 소감을 밝혔습니다. (285쪽)
첨단과학 시대는 종교계에 전례 없는 위기이자 동시에 역설적인 기회이기도 합니다. 첨단과학 시대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종교는 인터넷과 AI를 이용해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탄생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종교가 이러한 과학의 도전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성인들의 가르침 속에 담긴 시대를 초월하는 본질적인 지혜를 새로운 시대의 언어로 치열하게 재해석해 낼 수 있다면, 오히려 과학의 홍수 속에서 길 잃은 인류에게 새로운 영적 닻을 내려주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구원자 소임을 수행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히려 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인류의 꿈인 누구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공동체 시대를 열어가는 종교 본래의 역할을 찾게 될 가능성도 커지고 있습니다. 종교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올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289쪽)
종교가 제도와 교리를 넘어설 때 신앙을 ‘특별한 종교 행위’의 영역에서 ‘일상적인 삶의 방식’의 영역으로 온전히 되돌려 놓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우리를 옭아매던 ‘성(聖)’과 ‘속(俗)’의 이분법적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삶의 모든 순간이 바로 거룩한 진리를 체험하고 실현하는 살아있는 수행의 장소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 봅니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웅장한 성전 안에서만 신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침 식탁에서 나누는 가족과의 정겨운 대화 속에서, 분주한 직장에서 동료와의 진실한 협력 속에서, 그리고 저녁노을이 짙어지는 공원을 산책하는 고요한 순간 등 일상의 모든 조각 속에서 경이로운 신의 현존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299쪽)
첨단과학 시대에 종교가 마주한 위기는 결코 종교의 종언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가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진화하라는 시대의 요청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배타적인 제도와 경직된 교리의 낡은 옷을 벗어 던지고, 모든 경계를 넘어 서로를 연결하는 열린 네트워크로, 과학과 대화하며 끊임없이 성장하는 살아있는 지혜로,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일상을 거룩한 깨달음의 장으로 변화시키는 삶의 방식으로 거듭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간절히 꿈꾸어야 할 종교의 미래이며, 바로 우리 인류가 그토록 길고 험난한 영적 여정을 통해 마침내 도달하고자 했던 최종 목적지입니다. (300쪽)
그동안 종교인은 어느 종교에 소속돼 있는가를 먼저 따지곤 했습니다. 어느 교회, 어느 사찰, 어느 교단에 소속되어 있는지가 그 사람의 정체성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그 안에서 신앙은 공동체가 제시하는 교리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 집단의 일원으로서 충성을 다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이미 완성된 지도를 따라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안정적인 순례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종교 이후의 시대는 더 이상 ‘소속’의 문제가 아닌, 각자의 참된 진리를 찾아가는 고독하고도 위대한 여정이 될 것입니다. 종교인들은 더 이상 특정 종교의 소속을 따지는, 좁은 울타리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통해 진리를 찾아 나서는 독립적인 ‘구도자’이자 ‘순례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더 이상 완벽한 안내도가 아니라,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한 나침반이 될 것입니다. (303쪽)
첨단과학의 시대와 함께 인류는 이제 그 유년기를 지나 영적인 ‘성인기’로 들어서라는 시대의 부름 앞에 서 있습니다. 종교 이후의 시대는 바로 인류가 이 부름에 응답하여, 더 이상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영적 성숙을 책임지면서 주체적 신앙의 시대를 열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더 이상 신에게 무조건 의존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 그리고 우리 서로의 관계 속에 영적인 지혜와 자비가 깃들어 있음을 깨닫고, 우리 자신의 손으로 세상의 고통을 치유하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해 나가는 ‘창조의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낡은 종교의 시대가 저물어 간다기보다는, 오히려 인류 전체가 더 높은 차원의 영성으로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인 이유입니다. 우리 각자가 외부로부터 지도받는 시대를 넘어 스스로 진리를 탐구하는 구도자로, 믿음의 공동체를 넘어 실천하는 연대로, 그리고 마침내 의존적인 신앙을 넘어 책임지는 창조의 주체로 바로 설 때, 우리는 비로소 종교라는 이름의 모든 분열과 갈등을 넘어 ‘하나의 인류’로 서 다 함께 행복한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306쪽)
종교의 본질은 결국 성인 정신의 회복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특정 교리나 제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시원에 살아 숨 쉬고 있었던 성인들의 살아있는 가르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길은 절대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깊은 이기심과 맞서 싸워야 하고, 세상의 편견과 조롱을 견뎌내야 하며, 때로는 기존 종교의 저항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온갖 변질과 왜곡으로 신음하고 있는 종교가 다시금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성인 정신을 회복한 종교는 더 이상 서로를 향해 높은 벽을 쌓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결국 하나의 정상을 향해 가고 있는 동반자임을 깨닫고 서로를 존중하며 배우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다가 성인 정신을 회복한 종교는 더 이상 개인의 내세 구원이나 기복에만 매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신음하는 지구와 고통받는 이웃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이 땅에 정의와 평화를 세우는 일에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321쪽)
깨어있는 의식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 참된 종교인은 자신의 구원과 행복이 결코 타인과 분리될 수 없다는 깊은 자각에 이르게 됩니다. 나의 영적 여정은 나 한 사람의 해탈이나 천국행만을 위한 길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숭고한 공동의 여정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특정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인류 전체와 모든 생명을 끌어안는 통합종교의 희망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찾는 신은 더 이상 특정 종교가 독점하는 신이 아니라 모든 존재 안에 내재하며 우리를 더 큰 사랑과 정의, 그리고 평화로 인도하는 우주적인 신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최종적인 관심사는 자신의 교단 성장이 아니라, 인류공동체 실현에 모아집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기독교인과 불교인, 무슬림과 무신론자의 경계를 넘어 모든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과 손을 잡고 우리 시대의 가장 아픈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과 불평등, 전쟁과 폭력, 그리고 생태계의 파괴와 같은 인류 공동의 문제 해결에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신의 뜻을 이루는 가장 거룩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올바른 믿음과 참된 종교인의 길은 더 이상 교리나 의식 속에 박제된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 시작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실천을 거쳐, 마침내 인류 전체와 세상을 향한 헌신으로 완성되는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길입니다. (328쪽)
우리는 종교라는 이름 아래 교리와 제도의 견고한 성벽, 정통과 이단의 잔혹한 구분, 성직자들의 교만과 타락, 그리고 성인들의 살아 있는 정신이 화석처럼 박제화하는 과정을 목격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굳이 종교의 역사를 돌아보는 이유는 온갖 역사적·제도적·인간적 실패의 잔해들을 걷어낸 후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종교의 가장 깊고 순수한 본질, 곧 그 주춧돌이 무엇인가를 탐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神)과 나 사이의 살아 있는 관계의 회복입니다. 교리나 제도, 의식, 성직자 역시 본래는 이 근원적인 관계를 돕기 위한 친절한 안내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이 모든 것이 때로는 목적 자체를 가로막는 거대한 장애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종교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위적 중재자들을 넘어 우리 각자가 우주의 근원적 실재인 신과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길 외에는 그 어떤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330쪽)
우리가 종교 역사에서 보았듯이, 제도화된 종교의 가장 큰 비극은 신 과 인간 사이에 너무나 많은 ‘중간 관리자’를 두었다는 점입니다. 교회 와 사찰이라는 ‘제도’, 삼위일체와 사성제라는 ‘교리’, 그리고 목사와 신부, 승려라는 ‘성직자’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 모든 것은 본래 신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의 역할을 해야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표지판은 길 그 자체를 대체했고, 수많은 신도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대신 차가운 표지판 앞에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곧 신에게 충성하는 것”이라 가르쳤고, “경전의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이 곧 신의 뜻”이라고 끊임없이 주입했습니다. 여기다가 “신을 아는 것은 곧 교리를 아는 것”이라는 인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결과 신도들은 신과의 직접적 만남에서 오는 살아 있는 체험 대신, 안전하고 예측할 수 있는 제도와 교리라는 성벽 안에 머무는 데 스스로 익숙해졌습니다. 그래서 종교 본질의 회복은 곧 우리가 신에게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허무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이며, ‘신’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관계가 ‘이기적 자아’와 ‘소원을 들어주는 신’ 사이에 머문다면, 그것은 종교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복 신앙의 다른 이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신과의 진정한 관계 회복은 거짓 자아를 해체하고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참된 나(眞我)’를 일깨우기 위한 숭고한 과정입니다. 이때 신은 더 이상 초월적 심판자나 해결사가 아니라,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근원이자 본성 그 자체를 주관하고 이끌어가는 중심입니다. 따라서 신과의 관계 회복은 곧 잃어버린 참된 자아, 창조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위대한 여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334쪽)
우리가 지금까지 종교에 목맨 것은 한 번뿐인 인생을 아름답고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 그렇듯이 종교인의 삶 또한 어느 하나 만족할 것이 없었지만, 이제 종교 본질을 향한 여정을 마무리하고 결론에 이를 때가 됐습니다. 그것은 성인들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가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모든 종교인이 추구해 온 궁극적 실재, 즉 신의 모습을 닮으면서 영원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닦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 도자의 길인 동시에 나의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고, 우리 삶이 더욱 빛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342쪽)
■ 저자소개
권 오 문
세계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 스포츠월드 편집국장 등을 거치면서 저자는 오랫동안 취재현장에서 경험하고 발굴한 자료를 중심으로 여러 권의 서적을 펴냈다. 특히 《행복한 인간 백서》 《다 함께 누리는 행복》 《생각 나눔, 공감 그리고 행복》 《마음 혁명 비로소 행복한 나를 만나다》 《신가족시대 행복 만들기》 《전환기의 문화인식》 《디지털 문화 읽기》 《전환시대 생존조건》 《일본천황 한국에 오다》 《말 말 말》 《바다경영,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이것만 알면 바른 글이 보인다》 《글쓰기~ 한방에 끝내기!》 《논술 심층면접 한방에 해결한다》 《논술여행》 등의 저서들이 독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종교 관련 저서로는 김수환·정진석 추기경과 혜암·서옹 조계종 종정 등 종교계 원로들을 인터뷰한 《산다는게 뭔고하니》를 비롯해 《종교의 미래를 말한다》 《탈이념 탈종교시대 새로운 선택》 《종교는 없다》 《성인에게 길을 묻다》 《성인에게 듣는 시대정신》 《신(神)의 시크릿코드》 《이웃종교를 위한 변명》 《종교의 품격》 《분노하는 신》 《예수와 무함마드의 통곡》 《영계론, 사후세계를 말한다》 《하늘은 결코 손해보지 않는다》 등이 있다. 《왜 종교에 목매는가?》는 저자의 29번째 저서이다.
저자 연락처│전화 010-6213-5875, 이메일 omk2000@gmail.com